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일상다반사/도서,좋은글

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/내가 마실 갈 때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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책 소개

예리한 감성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사회 모순과 생활의 단면을 포착한 59편의 시들.

꽉 짜인 듯 보이는 일상이 얼마나 많은 틈을 지니고 있는지,

 

그 일상을 꾸려가는 우리들은 얼마나 허점투성이인지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은

섬세하며 성숙해진 시 세계를 보여준다.

 

작가 : 나희덕

 

1966년 2월 8일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,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.

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'뿌리에게'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.

 

시집 '뿌리에게', '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', '그곳이 멀지 않다', '어두워진다는 것'등을 발표했으며,

시론집 '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'를 출간했다.

 

김수영문학상 · 김달진문학상 ·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,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.

 

뿌리에게... 모순된 교육제도와 가족사 속에서 경색되고 놓치기 쉬운 아픔의 나이테를 여교사의 예리한 시선과

모성적 본능으로 찾아내어 독특한 민중적 서정시로 형상화한 첫 시집이다.

 

 

 

이 책중에서 내 맘 속에 가장 쏙 들어온 시는

 

내가 마실 갈 때 / 나희덕

마음이 하수구처럼 꾸욱 거릴 때 습관처럼 중얼거렸다, 그곳에 가야지

나를 씻어줄 강물 있는 곳 물줄기도 즈 이들끼리 만나는 그곳

 

어느 날 내 발목을 끌러 마실 간 다양 평장 날에 왔던 아낙들 봉다리 몇 개씩 들고 올라타자

버스는 강을 따라 시원스럽게 달린다

 

플라스틱 도시락, 설탕 한 포, 북어포, 그런 걸 사려고 강 따라 머리 날리며 그들은 마실을 나왔나

양수리에도 있을 그런 것들을

 

나는 못 견뎌 양수리로 가는데 그 양수리에는 어떤 못 견딤이 있어이 버스 안, 조는 얼굴로 만나는가

 

급정거할 때마다 내 안에 출렁거리던 물결 창틀에 부딪혀 쏟아질 듯하고

 

양수리, 마실 나온 마음들이 스치는 곳 삶보다는 강물이 길게 흐르는 , 그곳

.

.

.

.

.

마음이 하수구처럼 꾸룩 거릴 때 가고 싶은 곳, 만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운 나이인가 보다

언제든 마음 터놓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그립고 내 지인들에게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어 주고 싶다.

 

 

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/ 나희덕
 
이를테면, 고드름 달고  

 

빳빳하게 벌서고 있는 겨울 빨래라든가  

 

달무리진 밤하늘에 희미한 별들,  

 

그것이 어느 세월에 마를 것이냐고  

 

또 언제나 반짝일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 

 

나는 대답하겠습니다.  

 

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고,  

 

희미하지만 끝내 꺼지지 않는 게  

 

세상엔 얼마나 많으냐고 말입니다.  

 

상처를 터뜨리면서 단단해지는 손등이며  

 

얼어붙은 나무껍질이며  

 

거기에 마음 끝을 비비고 살면  

 

좋겠다고, 아니면 겨울 빨래에  

 

작은 고기 한 마리로 깃들여 살다가  

 

그것이 마르는 날  

 

나는 아주 없어져도 좋겠다고 말입니다

 

 

못 위의 잠 / 나희덕

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

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

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

 

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, 못 하나

그 못이 아니었다면

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

 

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

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

 

종암동 버스 정류장, 흙바람은 불어오고

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

 

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

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, 그 창백함 때문에

 

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

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

 

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

사내의,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

 

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

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

 

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

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,

 

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

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

 

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

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

 

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

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

못 하나, 그 위의 잠

 

.....

 

양 어깨 무거운 아버지와 함께이지 못하고 홀로 짊어진 어머니의 짐이

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시네요 ㅠ.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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